“돈이 없어서 못 하는 게 아닙니다. 좋은 정책을 찾지 못했고, 발굴하지 못했고, 의회도 행정부도 무능했던 게 사실입니다.”
원전 상생기금 50억 원 투입을 둘러싼 혼란 속에서, 영광군의 한 익명의 군의원이 털어놓은 이 발언이 지역사회에 강한 충격을 주고 있다. 기금의 본래 목적이 ‘군민 보상’과 ‘지역 안전 강화’임에도, 실제 집행 과정에서는 방향성과 전략이 완전히 실종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상생기금은 원전 지역 주민의 위험 부담을 보완하고 생활 향상을 돕기 위해 조성된 재원이다. 하지만 지금의 영광군은 그 막대한 예산을 어디에, 왜, 어떻게 써야 하는지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한 군의원은 “군민이 체감할 수 있는 사업, 세대가 공감하는 사업, 장기 지속 가능한 사업… 이론으로는 다 아는데 실제로 뭘 어떻게 기획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이 발언은 단순한 자조가 아니라 정책 설계 능력이 사실상 붕괴돼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행정 역시 마찬가지다. 내부에서는 “공모사업 의존, 용역 중심의 기획안, 관성적 행정이 여전히 고착화돼 있다”는 비판이 높다. 외부 용역이 가져오는 ‘기성품 사업안’에 군정이 기대고, 의회는 이를 검증하지 못한 채 통과시키는 구조가 반복되면서 상생기금은 항상 ‘익숙한 방식’으로만 소진돼 왔다. 익명 의원 역시 “우리가 직접 정책을 만들지 못하다 보니 행정이 가져오는 안건을 단순 검토하는 수준에 머물고, 결국 무난한 사업에 기대게 된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군민의 삶을 전혀 바꾸지 못한다는 점이다. 예산은 집행되고, 보고서는 작성되지만 정작 지역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없다. 익명 의원은 이 간극을 “사업비는 쓰는데, 삶을 바꾸는 사업은 못 만든다”고 정리했다. 정치인은 사업 실적을 홍보하지만, 군민은 ‘대체 무엇이 변했는가’라는 질문만 더 깊어진다.
상생기금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한 지역개발이 아니라 원전 지역의 불안과 위험을 보상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지금의 영광군에서는 그 목적이 사실상 퇴색됐다. 전문가와의 협업은 부재하고, 의회의 정책 경쟁도 사라졌으며, 분명한 비전 없이 예산만 쌓이는 기형적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기금이 ‘미래 설계의 도구’가 아니라, ‘연말 예산 소진용 통장’처럼 취급되는 현실이 지역사회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익명 의원의 마지막 말은 군정의 현주소를 정확히 보여준다.
“우리도 답답하다. 군민이 욕하는 걸 안다. 하지만 시스템이 없다.”
결국 지금 영광군에 부족한 것은 돈이 아니라 방향이다. 상생기금은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구조의 문제이며, 기금 운용 실패는 행정·의회 모두의 구조적 무능을 드러낸 결과다. 수십 년간 쌓여 온 재원이 군민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상생이 아니라 사실상 미래를 포기하는 선택이다.
영광군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예산을 쓰는 것이 아니라 ‘왜 쓰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며, 그 책임은 행정과 의회 모두에게 있다.